
보쿠로 연대기
Ep.02 — 몽멸의 밤
“그날, 세계는 잠들었고 아무도 다시 꿈을 꾸지 않았다.”
: 그 밤의 기록
세상은 너무나 조용했다.
기이할 만큼 맑은 하늘, 그러나 별 하나 없는 검은 창공.
공기마저 숨을 죽인 듯 고요했고, 바람은 창밖에서 방향을 잃은 채 맴돌았다.
어디선가 삐─ 소리를 내며 길게 울리는 뉴스 속보 방송이 텅 빈 공간을 가볍게 찢었다.
『긴급 속보입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몽멸” 상태가 확산되며…』
『REM 수면 반응 중단, 꿈 기록 전면 소멸… 꿈을 꾸는 사람은 사라졌습니다.』
뉴스 앵커의 목소리는 기계처럼 일정했고,
화면 속 표정 없는 얼굴들은 정보만을 전달할 뿐 감정을 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니터를 보며 고개만 끄덕일 뿐,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아니, 놀란다는 감정조차 잃은 듯 보였다.
그 눈동자엔 충격도, 공포도 없었다.
그저 '그렇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감정 없는 수긍.
창밖에선 사이렌이 울렸지만, 그 소리조차 마치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탁하고 느리게 흔들렸다.
: 어린 레브의 밤
그날, 레브는 아홉 살이었다.
불 꺼진 방 안, 창밖은 잿빛 그림자들로 덮여 있었고,
그는 책상에 혼자 앉아 연필을 쥔 채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탁, 탁, 탁——
시계 초침 소리가 벽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레브의 종이 위에는,
하늘을 나는 고래, 별 위에서 잠든 아이,
그리고..
눈부신 하얀 성벽 위에 서 있는 누군가의 실루엣이 있었다.
그림은 형체 없는 감정의 조각들이었고,
그 조각들은 붓 끝을 따라 하나의 세계로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툭.
손에서 연필이 떨어졌다.
아무 이유 없이, 마치 누가 멈추라고 속삭인 것처럼.
그림 위의 색들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짙던 푸른 하늘이 회색으로 바래고,
별빛이 닿던 아이의 미소가 뚝, 멈춰졌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것은 분명히 무언가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가슴 한가운데, 따뜻했던 무언가가 사라지며 남긴 서늘한 빈자리.
그날 이후, 세상은 회색이 되었다.
: 멈춰버린 세계
그 이후로 세상은 이상하리만큼 평화로웠다.
정해진 시간에 눈을 뜨고, 정해진 장소로 향하고,
정해진 표정으로 인사하고, 정해진 대답으로 대화를 끝냈다
정해진 감정 없는 일상.
뉴스는 말했다.
『감정의 외부 표현은 불필요한 신체 반응입니다.』
학교는 말했다.
『상상은 집중을 방해하므로 제한합니다.』
거리는 질서정연했지만, 심장은 뛰지 않았다.
광고판 속 미소도, 카페 창가의 대화도, 아이의 걸음도—
모든 것이 정지된 듯, 혹은 완벽하게 조작된 것처럼 정적이었다.
누구도 울지 않았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고,
누구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아무도 '꿈'을 꾸지 않았다..
: 그러나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레브는 가끔 그날 밤을 떠올렸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감각은 뚜렷했다.
소리는 있었지만 울림이 없었다.
그는 안다.
그건 단지 밤이 아니었다.
비가 내리지도 않았고,
전기가 나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그 밤은 세상이 ‘숨을 멈춘 밤’이었다는 걸.
그것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그의 안에 아직 살아 숨 쉬는 기억이었다.
그리고 지금, 손등에 떠오른 문양이
그때부터 자신의 안에 무언가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는 조용히 손을 펴 보았다.
은빛 문양이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꿈을 잊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라면…”
그 말은 누군가의 목소리였을 수도 있고,
그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온 메아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무가 다시 꿈꾸기 시작하고 있었다.
📌 다음 화 예고
Ep.03 – 감정이 사라진 사람들
복사된 하루, 반응 없는 얼굴들.
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존재가 된 레브는
무언가가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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